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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하다 보면 내가 있는 곳에서는 당연하게 보이던 것이 다른 세상에서는 꼭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지난해 10월 제가 필리핀 친구 임만(Imman)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에서 필리핀을 여행하는 동안 나눈 빨래에 관한 이야기를 정리한 겁니다. 꽤 사소해 보이는 소재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가지를 치고 뻗어나가 산업화, 기술, 도시 계획이라는 주제까지 이르렀습니다.

시작은 어찌 보면 엉뚱한 질문 하나였습니다. 임만이 미국 사람들은 빨래할 시간을 어떻게 확보하냐고 물었죠.

“글쎄, 빨래 할 시간이라고? 그냥… 하는 거 아냐?”

질문을 잘 이해를 못 했으니 제 대답도 다소 어정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릴 때는 온 집안 빨래를 전부 다 세탁기, 건조기에 넣고 같이 돌렸던 기억이 빨래에 관한 기억의 거의 전부고, 대학교 때도 기숙사 지하에 있던 빨래방에서 동전을 넣고 세탁기를 돌렸던 기억 정도가 남아 있을 뿐입니다. 사실 대학생이라고 해봤자 여전히 어리다면 어린 나이인데 스스로 빨래를 하는 모습에서 다 컸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도 납니다. 졸업 후에도 다행히 저는 세탁기와 건조기가 딸린 아파트에서만 살았고, 둘이 사는 저희 집 빨래는 일주일에 한 번, 몇 분이면 끝납니다. (옷을 넣고 옮기고 세제를 넣고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실제 빨래는 기계가 다 해주니까요.)

임만의 질문을 곱씹어보다가 우리가 지금 빨래라는 행위를 가장 효율적으로 하고 있는 건지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빨래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하는 집안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전에는 대부분 옷감이 울이나 가죽, 모직 천 등 튼튼함을 먼저 고려했기 때문에 물로 빨아내는 것이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먼지가 묻고 때가 타면 그냥 털어내서 또 입는 식이었죠.

산업화와 함께 면직물이 대량생산 되고 옷감이 바뀌었고, 사람들이 가진 옷도 더 많아졌습니다. 공중 보건에 대한 의식이 개선되면서 우리 주변을 늘 청결하게 해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입고 있는 옷도 예외가 아니었죠. 빨래가 일상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19세기 주부에게 “빨래하는 날”은 대단히 고된 날이었습니다. 양잿물에 동물기름을 섞어서 세제를 직접 만드는 일부터 장작을 패서 불을 지피고 잘 지지 않는 때를 지우는 단계까지 여간 복잡한 일이 아니었죠. 아직 다림질은 하기도 전에 삭신이 쑤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집에서는 돈을 주고 빨래하는 사람(대부분이 흑인 여성)을 고용했습니다. 1880년에 남의 집 빨래를 해주는 일을 하면 현재 달러로 환산했을 때 한 달에 약 17만 원 정도를 벌었습니다.

빨래가 큰 일감이 되자 경쟁이 치열해졌습니다. 19세기 중반부터 미국에 대거 이민을 오기 시작한 중국인들이 정착한 도시 곳곳에서 대규모 세탁소를 열었습니다. 1880년 기준으로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320개 세탁소 가운데 2/3가 중국인들이 운영하던 가게였습니다.

19세기 동안 전기가 보급되면서 세탁업 자체가 빠르게 성장했는데, 처음에는 사업체 혹은 부유한 남성 위주로 손님을 받던 세탁소들은 이내 가정 주부에게도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합니다. 기계화 덕분에 빨래하는 사람을 집으로 부르는 것보다 저렴한 값에 고된 빨래를 해줄 수 있었죠.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세탁소는 1920년대에 가장 번성했습니다. 하지만 전기가 보급되고 각 가정이 세탁기를 장만하기 시작하면서 내림세로 돌아섰죠. 저명한 미국 흑인 역사학자인 카터 우드슨(Carter Woodson)은 1930년 “빨래하는 흑인 여성(negro washerwoman)”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아래와 같이 썼습니다.

고된 일을 덜려는 (주부들의) 열망에 산업화 덕분에 보급된 가전기기가 더해지면서 빨래하는 여성은 빠르게 설 자리를 잃었다.

1940년이 되면 전체 2천5백만 가정의 60%가 세탁기를 들입니다. 2차대전이 끝나고 난 뒤 미국이 도시 근교에 주택 부지를 개발하면서 모든 가정에 세탁기는 한 대씩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퍼집니다. 세탁기 업체는 더욱 적극적으로 판매에 나섰고, 타이드(Tide) 사는 1946년에 가정용 가루 세제를 처음 선보입니다. 당장 세탁기를 들여놓을 수 없는 가정을 위해 동전을 넣고 빨래를 할 수 있는 빨래방이 생겨났습니다.

필리핀의 빨래의 역사는 꽤 달랐습니다. 먼저 도시와 시골에서 빨래를 하는 양상이 무척 달랐는데, 시골에서는 매주 한 번씩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빨래하는 날이 있습니다. 이날은 너도나도 빨랫감을 잔뜩 들고 강가에 모여 빨래를 하죠. 빨래하는 데 필요한 깨끗한 물을 확보하는 게 관건입니다. 강가에 빨래터로 적합한 곳이 있거나 지하수가 잘 나오는 곳이면 빨래와 요리를 하는 데 더할 나위 없습니다. 7천 개의 섬에 수많은 마을이 흩어져 있는 필리핀에서는 아직도 깨끗한 상수도 체계를 정비하는 일이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도시에서는 다같이 모여서 빨래를 하지는 않지만, 오랫동안 손빨래를 해왔던 건 비슷합니다. 세탁기가 소개되고 인기를 끈 건 불과 20년도 채 안 된 이야기입니다. 수도 마닐라에서는 요즘에는 중산층 이상 가정에는 집집마다 세탁기가 있고, (주로 시골 출신인) 파출부를 고용하는 가정도 많습니다. 한 파출부가 아예 그 집에 살면서 오랫동안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기르는 것도 도와주다 보니, 파출부는 거의 가족의 일원으로 여기는 가정도 흔합니다. 파출부가 숙식 외에 따로 받는 돈은 한 달에 약 10만 원으로 이들은 이 돈을 주로 고향에 있는 가족에게 부칩니다.

건조기를 쓰는 필리핀 가정은 거의 없습니다. 밖은 일년 내내 덥습니다. 사람들은 빨래를 밖에 널어 말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외선 덕분에 살균 효과도 있기 때문에 임만은 널어 말리는 방법이 더 효과적이라고 말했습니다. 특히 추운 겨울이 없는 열대 지방에서는 살균이 공중보건에 중요한 일일 겁니다.

미국에서는 정반대로 빨래를 널어말리는 일을 금지해 온 곳도 있습니다. 빨래가 널려 있는 모습이 미관을 해치고 가난의 상징이라 집값이 떨어진다며 아예 동네 자치회 같은 곳에서 이를 못 하도록 규정을 만들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지난해 10월에서야 빨랫줄을 금지하는 규정을 철폐했습니다. 그밖에도 빨래를 널어 말리자는 운동 덕분에 이런 금지 규정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필리핀의 세탁소는 미국의 세탁소에 비하면 훨씬 영세한 규모입니다. 세탁기 한두 대 정도를 놓고 주문을 받아 대개 한 가족이 운영하는 정도죠. 동전을 넣고 빨래를 하는 빨래방은 거의 없고, 오히려 현대식 대규모 세탁소는 몇 곳이 성업 중입니다.

처음 임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죠. 제가 내린 답은 간단합니다. 미국인들은 그저 가장 경제적이고 시간을 덜 쓰는 데 초점을 맞춰 빨래를 한다는 겁니다. 우리집에서 빨래에 쓰는 시간은 일주일에 25분 정도입니다. 아니면 7kg 빨랫감을 세탁소에 맡기면 35달러(약 4만 원)에 빨래에 다림질까지 싹 해서 배달까지 해주죠. 계산을 좀 해볼까요? 빨래에 들이는 25분을 제 시급으로 환산하면 저는 시간당 85달러 가치가 있는 노동을 하는 셈입니다. 빨래를 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측면까지 고려하면 돈을 들이느니 그냥 제가 직접 하는 게 더 낫습니다. 저는 그렇습니다. (건조기 대신 빨래를 널어 말리면 대략 6분 정도가 더 소요되고 제 노동의 가치가 시간당 68달러 정도로 낮아지겠네요.)

필리핀에서 똑같이 7kg 빨래를 세탁소에 맡기면 4.3달러(약 5천 원)가 듭니다. 마닐라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세탁소에 맡기는 것이 남는 장사일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아마 샌프란시스코의 제가 사는 동네에 있는 모든 가정집에는 거의 예외 없이 세탁기, 건조기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각각의 기계는 대부분 놀고 있죠.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빨래하는 게 고작이니까요. 만약 거대한 터널형 세탁기를 만들어서 동네 사람들이 모든 빨래를 그 기계에 넣고 한다면 빨래하는 데 드는 물을 절반 정도 줄일 수 있을 겁니다. 미국 사람들이 전부 이런 식으로 빨래를 하면 매주 약 100억 리터의 물 사용을 줄일 수 있을 것이고요.

물론 이는 가상일 뿐입니다. 실제로 터널형 세탁기를 만들어 모든 빨래를 한데 모아 하는 건 불가능하죠. 터널형 세탁기 대신 빨랫감을 수거하고 다 한 빨래를 다시 갖다주는 배달차량을 효과적으로 운영하면 못 할 것도 없는 일이긴 합니다만, 사람들은 옷을 내 몸의 일부라 여기고 빨래를 사생활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내 빨래는 내가 하는 게 편하지 누군가 내 모든 옷을 빨래해주는 일을 불편하다고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겁니다. 깨끗하느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냥 남의 손에 맡기는 게 싫은 거죠. 마지막으로 저같은 경우에는 빨래를 끝낸 옷의 향기를 맡으며 개는 그 시간이 무척 소중한데, 빨래를 남이 해주면 이 시간을 빼앗깁니다.

인구밀도도 걸림돌입니다. 즉, 미국은 땅이 넓어 대개 주택이 분산돼 있습니다. 인구밀도가 낮죠. 미국에서 가장 사람이 바글바글한 도시의 인구밀도가 마닐라의 절반입니다. 이러다 보니 미국에서는 이웃과 함께 공동으로 무언가를 하는 데 비용이 더 듭니다. 마닐라는 다릅니다. 빨래를 한데 모아 다같이 하는 게 돈도 아끼고 충분히 효율적일 수 있는 겁니다. 여기에 부수적으로 물도 아낄 수 있으니 지구에도 좋은 일입니다.

저는 언젠가 건조기 대신 빨래를 널어 말리는 일에 도전해보려 합니다. 글쎄요, 아직 안 해봐서 어떨지 모르겠지만,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기에 괜찮은 시간이 되지 않을까요?

출처:미디엄, 뉴스페퍼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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